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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승(울산대91)

주님이 주신 사랑의 빚을 갚으려고, 졸업 후 2017년까지 제주와 영남동부 지방회에서 간사로 섬겼습니다. 지금은 아내인 박희 학사(신라대IVF), 세 딸(가은, 소은, 지은)과 함께 서울 변두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개척 2년째인 ‘이음교회’를 목양하면서, ‘가들리 플레이’(godly play: 어린이 영성형성 교육)를 중심으로 온세대 통합 예배를 드립니다. 또한 교구 만드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지내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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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 사도행전 10장 9-23절 -

들어가며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부유한 박 사장이 아내에게 운전기사 기택에 대해 말합니다. “너도 알아? 기사 아저씨한테 냄새가 좀 나지 않아?” “지하실 같은 데서 나는 냄새.” “근데 얘가 선을 안 넘어. 알지? 그런 게 있어. 선이라는 게. 지하철에서도 그런 냄새 나는 사람들 있잖아. 근데 얘는 냄새가 나는데도 선을 안 넘어.”

이 대사에서 ‘냄새’는 단순히 후각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넘을 수 없는 계급의 경계를 상징합니다. 더 섬뜩한 부분은 박 사장이 기택을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그 ‘냄새’ 때문에 절대 넘어와서는 안 되는 선, 경계가 있다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0장의 이야기를 통해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경계’를 성령께서 어떻게 무너뜨리시고 우리에게 넘도록 하시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모두 경계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절대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선이 있었습니다. 그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경계였습니다. 그에게 이방인은 일종의 ‘부정한 냄새’가 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커다란 보자기에 온갖 부정한 동물이 담겨 있는데, 베드로에게 “일어나서 잡아먹어라”(13절)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베드로의 즉각적인 반응은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나이다!” 였습니다. 율법을 신중하게 지켜온 베드로에게는 이 명령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위협처럼 여겨졌기에 단호하고 완강하게 거부합니다.

현대의 우리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르는 종교 경계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회가 경계를 만들고, 심지어 더 강화하지 않는지 의문이 듭니다. 사회관계망 서비스에서도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만 팔로우하거나 나와 다른 의견은 쉽게 차단해 버립니다. 이런 경계들은 마치 기생충 영화 속 ‘냄새’처럼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교제하기를 거부한 이유는 단순히 오만하거나 교만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뒤에는 자신의 정체성이 공격받는 듯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이방인과의 교제는 종교적 부정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손상될 수 있고, 유대 공동체에서도 배척당할 수 있다는 사회적 두려움이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경계 뒤에도 종종 내 신앙 정체성을 뒤흔든다고 느끼는 두려움이 숨어있습니다.

하나님은 경계를 허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유대 그리스도인의 경계를 허무실 계획이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 백부장 고넬료를 준비시켰고, 동시에 욥바에 있는 베드로도 준비시켰습니다.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며,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2절)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시킨 또 한 사람, 베드로가 환상을 보며 혼란스러워하던 바로 그 순간,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문을 두드립니다.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20절)고 하십니다. 현대의 선교학자들은 이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고 부릅니다. 선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며, 그 일을 위해 인간이 준비되고 참여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선교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이방인 고넬료가 아니라, 사도 베드로의 저항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속되고 부정한 것을 먹은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14절)라고 단호하게 거부했을 때, 다시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15절). 이 환상 속 대화는 세 번 반복되었습니다(16절).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비난하지 않으시고, 세 번을 반복하며 기다리셨습니다.

경계를 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이 계획하고 이끄시지만, 인간의 참여가 있어야 완성됩니다. 그저 수동적으로 존재하기만 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적극적인 반응이 필요합니다. 이 반응이 바로 ‘경계를 넘기 위한 용기’입니다.

베드로가 보인 첫 번째 용기는 ‘환대’(hospitality)입니다. 그는 고넬료가 보낸 이방인들을 “집에 불러들여서 묵게” 했습니다(23절). 작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급진적인 행동입니다. 당시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있는 일은 종교적으로 금기시되었습니다. 환대는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낯선 자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안전한 공간을 내어주는 용기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환대란 적을 친구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와 다른 배경, 다른 생각, 다른 신앙색을 가진 사람들을 나의 공간으로 초대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