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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득훈(목사)

한국 사회의 빈부격차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한 선교 단체를 만나 성경 공부와 제자 훈련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러다 영국 유학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귀국 후 교회 개혁과 사회 선교의 길을 걸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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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게임, 교묘한 맘몬의 덫 : 신앙인의 해방 가능성

잘 아시는 대로 한국은 근대사 최초로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나라입니다. 그 과정에서 국민들의 정서가 완연히 달라졌습니다. 노력하고 운이 따라 주면 사회적 상승이 제법 가능했던 시기(1960년대-2010년대 초반)에는 사람들이 희망을 품고 치열한 시장 경쟁에 뛰어 들었습니다. 다양한 버전의 기복 신앙은 그런 대열에 합류한 그리스도인들의 성공 욕망에 정당화 논리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고도 성장기를 지나 저성장 및 침체를 겪게 되자 사정은 달라졌습니다. ‘노력하면 너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은 마력을 잃었습니다. 대신 ‘시시각각의 경쟁에서 낙오되면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는 염려와 두려움이 사람들을 엄습했습니다. 여기서 생존의 위협이란, 어찌어찌해서 먹고는 살겠지만 ‘쓸모없는 존재’로 추락하는 것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을 뜻합니다. 예전엔 큰 성공을 욕망하는 이들이나 뛰어들었던 주식, 펀드, 코인 그리고 부동산 투자 및 투기 시장에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드는 이유도 생존의 위협 때문입니다. 두둑한 보상을 향한 욕망보다는 낙오 가능성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싶은 생존 본능이 경제 활동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경쟁에서 승리해야한다는 결의와 각오가 그 만큼 처절하고 절박해졌습니다.

저는 이런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낙오의 염려와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해보려 합니다. 오늘의 현실에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이기에, 미안한 마음을 담아 조심스럽게 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개인적 해방의 길, 신앙공동체적 해방의 길, 정치적 해방의 길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 취지는 가능한 한 이 길들을 동시에 가야한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각자의 은사와 처지에 따라 집중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해 상호 협력하고 연대하는 것도 좋지만 말입니다.

개인적 해방의 길

글을 준비하면서 새삼 주목하게 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맘몬 숭배 경고가 ‘염려’라는 맥락에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마 6:25-34). 저는 그동안 맘몬 숭배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과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맘몬 숭배에서 벗어나려면 생존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생존’은 글머리에서 언급한 생존보다는 더 기본적인 뜻을 지닙니다. 경제가 미발달된 고대 농경사회에선 이 생존에 대한 염려가 당연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맘몬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하나님과 맘몬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삶이 상충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기고 싶어 할까요? 바로 염려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철저히 따르다 보면 과연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확보할 수 있을까’, 불안해 집니다. 경제 활동은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해야만 하는 까닭입니다. 경제 활동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고지식하게 추구하다보면 맘몬의 미움을 사 낙오하는 게 아닐까 두려워집니다. 그래서 신앙공동체에선 하나님을 따르고, 세상에선 맘몬을 따르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가장 기본적으로는 각자가 생존에 대한 염려에서 해방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제안을 유심히 살펴보면 삼단논법의 기본적인 틀에 경중(輕重) 논법이 소전제를 고리로 결합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전제]

하나님은 새에겐 먹을 것을 공급하시고 백합화에겐 멋진 옷을 입히시기에, 그들은 전혀 염려하지 않는다.

[소전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새와 백합화보다 귀하다(경중 논법).

[결론]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먹고 마실 것을 확실하게 공급해 주실 것이니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 논법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새는 먹이를 찾기 위해 열심히 하늘을 날아다니고, 백합화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뿌리와 이파리로 열심히 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생존을 위해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생존을 책임지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에 더해 예수님은 명백한 상식을 덧붙이십니다. 염려한다고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으니 염려를 아예 집어던지라는 겁니다. 물론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명쾌한 논리와 상식이 담겨 있다고 해서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말씀에 의거해 염려를 극복하려는 태도가 논리적이고 상식적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