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i230_1702_태극기휘날리며십자가를지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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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일 (고려대88) IVF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 소장. 1993년부터 캠퍼스 간사를 시작했고, 종교학으로 학위를 받은 2015년부터 제정신을 차리고 연구소 사역에 나서고 있다. 특히 공부하는 그리스도인 모임을 위한 수단과 방법이라면 가리지 않고 모색 중. 책장을 넘기며 왁자지껄 토론하는 독서모임이 전국에 가득하기를 기도한다. 회사를 다니며 집안을 살리는 아내, 대학 와서 IVF도 하는 큰딸, 맛 난 음식을 보면 기분이 업!되는 고1 둘째딸과 서울 홍제동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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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한국개신교의 보수적 정치참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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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연말에 시작된 대통령 퇴진요구 촛불시위는 연인원 천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실제 국민 5명 중 1명이 이번 집회에 참여했다는 설문조사 도 있습니다. 믿기지 않는 시민들의 자발적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촛불시위에 맞불을 놓겠다고 나선 탄핵반대그룹에, 성가대 가운을 입고 대형 십자가를 메고 태극기를 흔드는 기독교인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보톡스 안 맞은 자 있습니까?”라며,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구호를 외치는 목사도 있었습니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공개적인 정치참여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물론 전도 집회 등을 크게 치른 적은 있지만 일반적으로 한국개신교의 정치적 메시지는 사회에 직접 알린 것이 아니라 교회 신자들에게 호소하는 데 쓰였습니다. 과거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했던 정치사회적 활동은 민주화 이후 계속된 보수정권의 집권 실패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적 개 신교인들을 세상으로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보수적 개신교인들의 정치적 행동주의’가 종교사회학자들의 연구 주제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한국개신교 주류를 차지 하고 있는 보수그룹이 언제부터 어떻게 정치적 보수성을 형성하고 세상과 관계 맺어 왔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개화기 한국개신교는 당대 핵심 과제였던 근대화와 독립을 이루는 데 앞장서면서 진취적 면모를 보였습니다. 이런 진취성의 이면에는 ‘사회진화론’과 ‘국가유기체론’이라는 근대의 이데올로기가 깔려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시 유행하던 생물진화론의 적자생존 현상처럼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생각과 국가는 개인을 넘어선 독립적인 생명체라는 생각을 뜻합니다. 이런 사고는 산업혁명에 성공해서 대자본을 갖춘 선진 근대 국가들과 후발 근대국가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자기정당화 논리였습니다. 일본도 이런 사상을 수용하면서 국가 주도의 근대화를 추진했고 제국주의적 근대국가로 변모했습니다. 한국의 근대화론자나 민족주의 독립 운동가들은 일본의 사회진화론과 국가유기체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국민계몽을 통한 부국강병 전략을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일본의 폭압적인 식민통치를 자연 법칙인 양 합리화하고 약자였던 조선의 무능을 탓하는 친일 세력을 형성시켰습니다.

초기 미국 선교사들은 학교, 병원 등 근대적 제도를 전수했습니다. 개신교인들은 서구 열강과 일본의 식민지화 시도를 저지할 수는 없었지만, 국권을 되찾는 저항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3.1운동이 대표적입니다. 무려 7979명이 살해되고, 1만 5961명이 다쳤으며, 4만 6948명이 검거되는 등, 3월과 4월 사이 전국에서 지속된 독립청원시위에 개신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당시 가장 유력한 종교였던 천도교의 경우, 전체 종교인 2만여 명의 참가자 중 11.8%(2297명)였으나 아직 신생 종교였던 기독교는 17.6%(3236명)였습니다.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개신교의 사회참여는 안타깝게도 거기까지였습니다.

1910년 조선 강제병합이 완성된 후, 일제는 ‘포교 규칙’(1915년)을 앞세워 미션스쿨의 종교교육을 금지하였고, 총독부의 기획에 의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조합교회는 ‘조선인을 동화시켜 우리의 충성스런 신민들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20년부터는 기독교단체들에게 법인설립을 허용하여 재산권을 보호하고 세금감면도 해주었지만, 대신 재산 상황이 총독부의 통제 속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선교사들에 게서는 대표적으로 “모든 권세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니 권세자에게 굴복하라”는 로마서 13장의 오용이 시작되었습니다. 제도에 편입된 기독교로서 국가권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조직의 생존과 확장에만 큰 관심을 두는 경향’과 다르지 않습니다.

반(反)기독교운동을 벌이던 사회주의 세력과 대립을 시작한 개신교 측은 1932년 9월 총회에서 ‘사회신조’를 발표해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되, “일체의 유물교육, 유물사상, 계급적 투쟁, 혁명수단에 의한 사회개조와 반동적 탄압에 반 대한다”는 문구를 넣어 반공적 태도를 명백히 했습니다. 이렇게 반공주의는 한국전쟁 훨씬 이전인 1930년대부터 주류 기독교권에 퍼져있던 생각이었고,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입장이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기독교계와 사회주의계의 살기어린 갈등은 이미 한 세대 전부터 축적되어 온 것이었습니다.

또한 1930년대 한국개신교는 신학적으로 근본주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근본주의 지도자인 그레샴 메이천을 따르던 북장로교파 선교사들이 ‘조선복음동지회’를 만들고 근본주의적 관점으로 당시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다양한 신학적 시도를 비판하였습니다.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시대적 과제와는 동떨어진 흐름이었습니다.

한편 일본은 1930년대부터 국가주의로 무장한 청년장교들의 구테타 시도에 민주정부가 무너지고 군부가 주도권을 쥐면서,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을 감행했습니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일본의 위력을 절감한 한국기독교는 일본 식민통치에 완전히 순응하기 시작했습니다. 1938년 장로회 총회에서 공식 결의한 신사참배는 일제통치에 대한 한국개신교의 최종적 항복 선언이었습니다. 원래 신사 참배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조선의 병참기지화를 노린 내선일체 전략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므로 국민의례처럼 했던 천황 배례는 천황으로 대표되는 일본 국가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숭배로 평가해야 합니다. 이로써 사회주의운동세력과 대립하며, 근본주의 기독교 신앙과 국가주의 사회관을 갖춘 한국개신교의 보수적 모델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한국개신교의 당시 결정을 부끄럽게 하는 독일 교회의 사례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나치의 국가통치를 정면으로 거부한 독일 고백교회는 ‘바르멘 선언’(1934년)을 발표합니다. “국가는 세상 속의 정의와 평화를 확립해야 할 과제를 맡았다. (중략) 교회는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쌍방의 의무를 일깨워준다. 국가가 교회가 해야 할 일까지 해버릴 경우, 우리는 이것을 배격한다. 반면 우리가 국가의 어느 한 기관이나 된 듯이 국가의 위엄을 가져서는 안 된다.” 독일 고백교회와 달리 일제 시기 한국개신교는 정교분리라는 전통적 원칙을 깨고 타협했습니다. 타협의 근거가 무엇이었을까요?

3년간의 한국전쟁에서 무려 5백만 명이 죽거나 다침으로써, 남한 사회에서 반공주의는 당연한 정서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반공이 구원의 교리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휴전보다는 북진통일을 누구보다 강하게 주장했고, 반공을 위한 희생적 순교의 각오를 미국 트루만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에게 밝히려는 기독교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북한이 빠르게 전후복구사업을 통해 경제개발을 해나가자, 남한의 반공주의는 체제경쟁을 위한 승공론(勝共論)으로 발전 했고, 한국개신교는 인권을 제한하는 독재정치를 하나님이 허락한 권세로 수용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협조했습니다. 이런 지지를 받은 독재정권들은 경제규모를 급격히 키웠으나, 독점 재벌과 유착하여 기득권 연합을 공고히 하면서 사회적 양극화를 낳았고, 이로 인해 인권과 사회적 공공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1970년대 초반, 반공주의적 국가주의 체제가 위협을 받게 됩니다. 미국과 중공(중국) 사이에 화해무드가 조성되면서, 한국은 물론 한국개신교는 심각한 긴장상태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통해 더욱 강력한 반공주의 국가체제를 만들 목적으로 유신체제를 강행했 고, 한국개신교 보수진영은 지지선언을 했습니 다. 1974년에는 ‘민청학련’ 가담 혐의자로 1024명을 조사하고, 7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등 저 항세력을 강력히 탄압하였습니다. 반면 그해 여름에는 복음전도운동인 ‘엑스플로(explo)74’대회(연인원 665만 명)가 정권의 지원 속에 개최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