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i211_1312_정의와공의를행하는그리스도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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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주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전임연구위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와 신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어진 경전으로서의 신구약 성경을 후대에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 뿌리에는 공평과 정의로 부름 받은 삶, 하나님 백성의 기본적인 틀로서의 희년에 대한 관심으로 대표되는 복음의 공공성이 놓여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쳤고,현재는 하나님 나라의 구현과 한국 기독교의 재구성을 추구하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전임연구위원으로 활동히고 있다. 저서로《특강 예레미야》(IVP)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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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경제 체제는자본주의(廣本主義 capitalism)이다. 한자 자체는 ‘자본이 중심인 사상’을 의미한다는점에서 오직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는 기독교인들이 크게 반발할 것 같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런데 비숫한 방식의 표현이지만 특이하게도 기독교인들이 대단히 싫어하고 거부하는 표현으로 “인본주의(人本主義)”라고 번역되는 “휴머니즘(humanism)”을 들 수 있다. 말을 풀자면,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놀라운 것 은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던 대부분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인본주의’에 대해서는 사탄의 대명사쯤으로 생각하고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거부하고 공격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자본이 주인이 되는 것은 크게 상관없는데, 사람이 주인이 되는 꼴은 못보겠다’라고 할 수 있겠다. 정작 주님은 하나님을 대신해 버리는 것으로 “재물(헬라어로 맘몬)”을 언급하셨지만(마 6:24), 오늘 우리 교회는 ‘자본주의’보다는 ‘인본주의가 훨씬 더 무섭다고 여기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 당시 로마시대는 여러 종교에 대한 대단한 관용의 시대였다. 그로 인해 수많은 종교가 범람하고 번성하였다. 그 종교들마다 사람의 마음을 끌고 잡아당기는 측면이 있었겠지만, 복음서에는 타종교에 대한 심판과 정죄의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삶을 위협하는 단 하나는, 위에 인용한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타종교가 아니라 바로 “맘몬”이었다. 수많은 종교마다 이런 저런논리와 주장, 신화들을 지니고 있지만, 결국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자기네 종교를 믿고 따르면 부귀영화와 존귀, 번영을 누리게 된다는 것, 그것을 이 세상에서 누리든지 아니면 죽음 이후에 누리게 된다고 약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재물을 의미하는 “맘몬”이야말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대신하는 가장 큰 우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임을 기억할 때, 시대를 불문하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맘몬을 배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재물이 어떤 식으로 우리의 삶을 파고 들어오는지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검토하고 이해하는 것이 신앙 공동체의 급선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재물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는 ‘자본주의’ 세상이라면, 자신을 끊임없이 확장하며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재물의 논리에 올바르게 맞서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사탄 혹은 공중 권세 잡은 이가 그 힘을 가장 잘 드러낼 영역도 바로 이 재물, 자본을 중심에 두는 사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은 구체적으로는 자본과 재물의 논리를 이해하고 맞서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단지 입술로 그 이름을 고백하며 주변에 널리 증거하는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본과 재물의 논리에 대적하고 맞서는 것이 기도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자본과 재물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도록 하신 것도 바로 그와 같은 목적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을 한번 생각해 보자. 아브라함은 흔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의 약속과 연관하여 기억되곤 한다. 그러다 보니 늘 창세기 12:1-3에 있는 세 가지 복이 단골로 언급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복을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 점은 창세기 18: 19 에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9)
이에 따르면 하나님은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 은 이 명령을 수행할 주체, 그리고 이 명령을 수행할 공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며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겠다고 약속하시고 그것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땅과 자손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관계의 핵심이 아니라, 진정한 핵심인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을 위한 배경이요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땅과 자손의 복은 부르심의 핵심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이다. 부르심과 선택의 주된 목적은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이다. 그런데 마치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이 특별한 땅이고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특별한 땅이라고 여긴다면 하나님은 그 곳을 무너뜨리시고 그 성전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신다. 이스라엘이 마치 하나님의 선민인 것처럼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긴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진멸하시고 그들을 이방 땅에 흩어버리신다. 그들에게 핵심은 땅과 자손이 아니다. 예루살렘과 아브리함의 자손 됨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이 특별한 것이며 중심인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도 이런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교회 공동체가 세상 가운데서 의와 공도의 삶을 살지 않은 채 , 교회건물을 자꾸 짓고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식의 말을 내뱉게 될 때,반드시 하나님은 그 건물을 허물어 버리실 것이다. 예수를 고백하는 것을 특별하게 여기며 믿는 자는 천국이요 불신자는 지옥이라는말만하고 있을때, 하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이들로 전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개역개정판 성경에서 번역 용어를 자주 바꾸는 바람에 우리는 ‘의와 공도’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표현인 ‘째다카’와 ‘미슈파트’가 얼마나자주 성경에서 반복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여기서는 ‘의’로 번역되었지만 개역개정판에서 종종 ‘공의’로 번역되는 ‘째다카’는 ‘올바른 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의 근본은 우는 자 들과 함께 울고 웃는 이들과 함께 웃는 것으로 요약해볼 수 있으며,이를 가리켜 ‘내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표현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창세기 구절에서는 ‘공도’로 번역되었으나 개역개정판에서 대체로 ‘정의’로 번역되는 ‘미슈파트’는 ‘재판을 통해 억울하고 부당한 일이 바로 잡혀지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재판은 지도자가 해야할가장중요한 업무 사항이라는 점에서, 미슈파트는 법적 제도적 영역과 연관된 사항이라고 할수 있다. 결국 째다카가 우리가 늘 대면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과의 관계를 가리킨다면, 미슈파트는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측면을 담아낸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째다카와 미슈파트,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을 찾으신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손이 이렇게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을 살 때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