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

이삼열(연세대87)

과학기술정책을 전공하고 있는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입니다. 현재는 연세대 아프리카 연구원 부원장도 맡고 있습 니다. 학부 주전공으로 IVF를 했고, 행정학은 부전공이었습니다.

</aside>

이삼열이사장.jpg

‘계엄’이라는 단어가 방송에서 흘러나오던 날, 나는 남산에서 출발해 집으로 가는 버스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주한 아프리카의 대사님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는 길이어서 마음이 흥겨웠다. 덩달아 승객도 모두 즐거운 듯 보였다. ‘계엄령 선포’라는 단어는, 그런 버스 안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이게 무슨? 개그 프로그램 제목이라도 되나?’ 했는데, 휴대전화 포털에 나타난 그 뉴스는 진짜였다. 동영상을 틀었더니 대통령이 세상을 구하겠다는 듯한 비장한 표정으로 계엄을 선포한다. 헐! 웬 농담인가 싶었는데, 계엄사령부의 포고문을 읽으면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릴 적 겪었던 폭력을 50대 후반에 들어와서 또 경험하다니. 어이가 없어졌고,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 2024년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왜 계엄령을 선포했는지 구구한 변명들이 있지만, 어떤 이유로도 대한민국 시민들이 피와 땀으로 일궈 온 민주주의의 틀을 깨는 행위는 정당화할 수 없다. 또한 계엄령에 참여했거나, 계엄을 사전에 알았음에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으며 동조한 이들은 마땅히 준엄한 법의 심판에 처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일상에는 늘 ‘절대 가치’와 ‘상대 가치’가 섞여 있다. 현실은 단일의 수평선이 아니라 여러 겹의 수평선이 겹친 형태처럼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단일의 수평선을 상정한 이분법적인 사고는 매우 왜곡된 관점으로 빠지기 쉽다. 대부분의 현실 문제는 절대 가치가 아닌 상대 가치로 판단 할 수 밖에 없는데도, 많은 이가 이분법적 사고를 한다.

나는 페이스북과 같은 SNS를 자주 하는 편인데, 되도록 정치 선호도를 밝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선호도를 밝히면 원하지 않는 사람이 나를 팔로우하거나 팔로우하고 싶은 사람이 나를 덜어내기 때문이다. SNS는 세상을 넓게 접할 수 있는 창이 되어야 하는데, 생각을 명확하게 드러낼수록 한쪽만 열린 반쪽 창이 된다. SNS를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겠으나 내게 있어 한쪽으로만 열리는 창은 불편하기 그지없다. 신문이나 유튜브를 볼 때도 정치 의견에 상관없이 균형 있게 보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나만의 비눗방울 속에 갇힐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간혹 일상에서 사용하는 정치 언어가 폭력이 되어 돌아올 때가 있다. 보수와 진보, 빨갱이와 파쇼 등으로 갈등에 접근하지만, 이는 견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방식이라서 우려된다. ‘국민의힘’ 지지자들을 ‘2찍’이라고 비아냥거릴 때 탄식했고, 민주당 지지자들을 ‘좌빨’이라고 부를 때 분노했다. 예전에는 술자리에서나 조심스레 꺼내던 조롱이 현재는 걸러지지 않은 채 인터넷을 타고 퍼져나가는 양상을 보며, 우리 사회에서 중도층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고 느낀다. 사회에서 사용하는 말들은 점점 날이 서며 듣는 이에게 깊은 상처를 낸다. 자극적인 콘텐츠가 높은 수익을 챙겨가고, 미디어는 이미 갈라진 이들을 한층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는 ‘사회 지형의 비틀림’이다. 미움과 저주와 독설이 수익을 만들어 내는 이 구조는 마치 절망으로 빠져들어 가는 급행열차 같다. 때문에 유사 프로그램들을 볼 때마다 아찔한데, 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디어 환경이 전 세계의 문제로 확산되어 늦기 전에, 국제 사회가 어떻게든 개입할 필요가 있다.

나이가 들면서 개인적으로 안면 있는 사람들이 자주 TV와 유튜브에 등장하고 있다. 어릴 적에는 ‘TV에도 나오는 선생님들인데, 하시는 말씀에 일리가 있겠거니’ 하며 열린 마음으로 시청했다. 그러나 요즘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또 다른, 숨겨진 세계를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가 내가 아는 특정 인물을 존경한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지만, 동시에 그 인물의 다른 면도 알고 있을지 생각해 보기도 한다. 해외 유명 대학의 ‘정의론’ 교수가 정작 학과 안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삶을 산다는 사례가 있듯이 말이다.

때문에 정치인을 판단할 때는 삶의 궤적을 기준으로 삼고 싶다. 예를 들어 지방선거 투표가 있으면, 나는 선거공보를 보면서 이 사람은 출마하기 전 어떤 직업을 갖고 살아왔는지 확인해 본다. 놀랍게도 직업을 이력서에서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잦다. 어떤 후보는 40살이 넘도록 뚜렷한 직업이 없었다. TV에 자주 등장하는 직업 정치인들의 이력도 무척이나 궁금하다. 청문회가 열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저렇게 많은 돈을 모았을까 묻고 싶어진다.

방송에 등장하는 유명인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한다. ‘평등한 세상을 주장하는 저 사람은 평소에 기부하거나 자기 시간을 내어서 봉사를 하고 있을까?’ ‘평등과 배려를 부르짖는 저 사람은 재산을 꽤 모은 것 같은데, 혹 남모르게 선행을 하고 있는 걸까?’ ‘능력주의를 부르짖는 저 사람은 과연 지금의 자리에 자신의 능력으로 올라섰을까?’ ‘어릴 적에 값비싼 사교육을 받고 유명한 대학을 나온 저 사람은 정말 자신의 능력만으로 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라는 여러 가지 질문을 자문하게 된다.

특히 공직에 나서는 이들에게는 더욱 높은 기준을 설정하고 살펴야 한다. 공직에 나섰다면 그 사람의 말은 더욱 무게가 있어야 하며 삶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때문에 단순히 내세우는 주장뿐 아니라,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에 더 주목하고 있다. 편법을 써 자식에게 자산을 증여하거나, 경영 경험이 일천한 자녀가 경영에서 큰 업적을 낸 것처럼 급속 포장을 했으면서 다른 곳에서는 능력주의를 주장하는 공직자를 보면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유리한 환경에서 태어난 이들은 더욱 기본적인 배려심을 가져야 하는데, 이를 고려치 않으면서 능력주의 주장을 내세우면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따라서 자신의 주장을 삶으로 나타내며 살아가는 이들을 좀 더 존경하게 된다. 어떤 재벌이 장학금으로 1조 원 이상 내어놓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삶의 궤적이나 그가 운영하는 기업의 경영 형태에 많은 문제가 있긴 하지만, 큰돈을 자신과 가족의 편안함을 위해 쓰지 않고 장학 재단으로 조성한 행동은 과오를 덮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프리카 차드에서 교육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학교를 세워 운영하는 친구가 있는데, 참 존경스럽다.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삶이 묻어 있기 때문에 늘 마음에 담게 된다. 카자흐스탄에서 20년 넘게 봉사하고 있는 선배를 볼 때도 늘 존경하는 마음이 앞선다.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쳐 노력하는 이들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들이다. 살아가는 동안 사람에게 과오가 하나도 없을 수는 없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내가 주장하고 옹호하는대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늘 무겁게 마음에 품고 싶다.

거리에 성조기와 십자가가 나타나면 마음이 답답하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주장의 근거를 십자가에서 찾으려는 듯했다. ‘내 정치적 주장은 성경에 근거했기 때문에 반박 불가!’라고 윽박지르는 듯 보였다. 다양한 환경 시위 현장을 가 보면 예전에 비해 십자가를 지고 걷거나 삼보일배를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하지만 정책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종교적 상징이 시위에 동원되는 일은 매우 우려스럽다. 한쪽 주장의 근거로 십자가가 나타나면 더 이상의 토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책 논쟁’은 극소수의 이슈를 제외하면 대체로 이익과 손해를 둘러싼 주고 받기이며, 절대적인 해답이 존재하지 않기 마련이다. 따라서 절대 가치의 틀을 들이밀면 대립과 갈등만 촉발할 뿐이다.